빛, 생명 그리고 사랑

1. 생명있는 것들에 대한 가슴 따뜻한 응시

3월의 아침,

새벽녘 다녀간 바람의 흔적과 겨우내 몸속을 들락거린 개울의 흔적으로 제 존재를 드러낸 꽃망울이 오래오래 닫혀있던 마음을 환하게 열고 있다.

싱그러운 생명감이 충만한 봄 ,생각해 보면 화가의 봄은 꽃과 더불어 첫 작업이 시작되는가 싶다.

김현승은 유달리 봄을 좋아하는 봄의 화가다.

그가 길러온 꽃은 화사하다기 보다는 한결같이 맑고 투명한 생명미감이 풀어져 있어 그의 작품 또한 한결같이 봄을 닮아 있다. 작품마다 봄빛 선명한 삶의 빛을 풀어놓고 독자로 하여금 삶의 현재를 되돌아보게 하고 꿈과 희망에 가득한 삶을 전망하게 한다.

화폭마다 등장하는 정물들, 즉 꽃이며 나비, 새 그리고 잠자리는 그 자체로 작가의 꿈을 대변해줄 만큼 우리의 삶과 자연에 친숙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자연과의 관계 지움을 통해 오히려 기존의 관계를 풀어버리고 개성적인 상징으로 다시 무늬 지우려 한다.

그러기에 그가 작품 안에 풀어 놓은 조형사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가슴 따뜻한 응시와 관계 지움이다.

인간과 자연

삶은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삶의 본질이요 전형이다.

김현승의 자연은 따사롭고 맑고 수려한 정화된 생명의 세계를 표징 한다.

세상의 생명에 대한 애정깊은 사랑과 포용, 세상의 혼미한 삶을 기독교적 시선으로 끌어 안고

자연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야심찬 의도를 보면 요즘 화단에서 보기 드문 조형사유를 만날 수 있다. 화려하면서도 따뜻한 생명미감은 마침내 수묵담채의 개별성을 이루었는가 하면 ,평면의 한계를 극복하고 개성적 조형어법을 선보이며 새로운 한국화의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는 관념산수화 중심의 남도 회풍과는 차별성을 두기 위해 형식과 내용, 기법 면에서도 그 나름의 창조와 발견으로 끊임없이 남도 한국화의 가능성을 예견해 주고 있다.

그가 요즘 들어 즐겨 사용하는 조형기법은 석채화다.

돌가루를 사용하여 자연의 질감을 그대로 평면에 옮겨놓음으로써 원형적 생명감을 표현해 내려 한다.

돌가루를 아교와 섞어 투박한 질감을 드러낸 마티에르 위에 채색을 하는 기법, 아니면 체색화 위에 흰 돌가루를 뿌려 오브제의 질감과 빛을 살리는 기법으로 자연과 빛의 원형성을 평면에 옮겨놓고 있다.

이는 자연적 생명미감의 깊이를 더하려는 그만의 개성적 조형장치다.

2. 꽃에 숨겨놓은 내적 풍경

그의 오브제 중에서 희망과 사랑이 충만한 꽃의 정서를 놓치고는 그림을 이해 할 수가 없다.

꽃은 그가 가진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이며 빛과 생명의 메타포다.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꽃을 보라. 본래적 모습을 보라.

현존하는 의미관계를 일체 끊어버리고 오직 빛에서 생명을 보라고 한다.

꽃에서 생명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보라고 한다.

복사꽃, 진달래, 산수유, 산벚꽃, 백합, 도라지, 해바라기, 석류, 꽈리, 수련 목련 등......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꽃들 또한 하나같이 관계의 망이며 매듭지움 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꽃은 또 다른 생명체와의 만남을 통해 화해와 사랑의 세계를 창조해 낸다. 수련위에 앉은 작은 물총새와 잠자리, 목련과 공작, 백합과 나비 그리고 무리지어 있는 꽃 속에 숨어 있을 법한 작은 생명체들과의 관계지움, 이것이 바로 그가 바라는 이상향의 재현이다.

그에게서 꽃은 빛과 생명, 희망에 대한 신념과 강한 의지를 표징 한다.

그의 꽃은 그저 때가 되면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이슬 등 자연의 품안에서 피어나는 생명체다. 아름답고 맑고 고운 삶에 닿으려는 작가의 갈망이며 답답한 현실적 삶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훼손된 생명은 이처럼 자연속에 내재하는 질서를 무너뜨린 결과에 다름 아니다.

풀어지고 헝클어진 관계를 원상회복하는 길만이 생명의 원형을 복원하는 길이기에 그는 마침내 자연을 닮은 색과 향으로 숨김없이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꽃의 의미성을 주요 상징 어법으로 선보인다.

그는 꽃이라는 일상적 소재가 새로운 예술적 의미로 변형 생성 될 때, 작고 하잘 것 없는 생명들이 한데 어울려 싱싱한 화해와 공존의 꽃으로 피어날 때 , 모두가 하나같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예술 작품이 다 그렇듯이 그림의 매력은 작가가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며 새롭게 해석 하려는데 그 매력이 있다. 그가 꽃이라는 오브제에 수겨놓은 메타포를 이해 하게 되면 생명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깊고 넓게 만나게 된다.

꽃에 숨겨놓은 내적 풍경.

그가 기실 들어가고자 하는 세계는 꽃의 메타포,즉 생명의 근원과 원형적 삶으로의 귀향이다. 외롭고 고단한 삶의 풍경이 아니라 희망적아고 건강한 생명력이 깃든 내적 풍경을 통해 순결하고자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줄기 밝은 빛으로 안내한다.

3. 원형적 생명을 향한 화해의 빛과 어둠

그의 조형언어에서 놓칠 수 없는 하나가 빛과 어둠의 대비적 색채로 드러낸 조형적 긴장감이다.

빛이 생명이라면 빛의 반대는 어둠 즉 죽음이다.

하이데거는 진정한 생명은 어둠에서 비롯되며 삶은 죽음에로의 선구를 통해 삶과 생명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며 생명의 원형을 제고한다고 한다.

생명에 대한 변형이자 따스한 화해의 손짓을 의미하는 그의 빛과 어둠은 새로운 삶의 길로 안내해 주는 생명 그 자체다. 어둠의 이미지를 통해 본래적 모습을 각성하는 한편, 빛의 사유를 통해 삶의 원형에 좀 더 깊게 닿으려는 작가의 낌새를 슬며시 드러내어 놓는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에서 전송되어져 오는 메시지는 사랑과 희망, 고결한 생명 미감에 대한 자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빛 ㅡ 꽃, 새 ㅡ 생명ㅡ 삶"

어둠 저편에서 스며드는 한 올의 빛은 훼손되고 더럽혀진 원형적 삶에 대한 부활인 셈이다.

이는 곧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이자 사랑이다.

무릇 생명 있는 것들은 순수하고 빛나는 것들이기에 훼손된 생명성의 본질을 회복하고 부활시키려는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을 빛으로 오롯이 보여주려는 의도는 복합적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생명감 있는 생명에 대한 재인식이다.

이는 또한 흰 돌가루를 사용하는 석채화를 즐겨 그리는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투박한 질감을 내는 마띠에르 기법, 색채미감과 생명미감, 빛과 어둠의 대비 등은 그가 드러내려는 조형사유와 맞닿을 수 있는 조형어법이다. 빛과 생명, 꽃과 생명 등의 연결성을 보면 쉽게 그가 풀어 놓은 조형사유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삶의 전형을 꽃과 나비, 새 현존하는 작은 생명체에 기대어 복원하려는 사유, 꽃들이 나비와 벌들이 다가오면 기꺼이 몸을 열어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듯 그의 사유의 품에 안겨있는 풍경 또한 새로운 생명세계를 향해 고요하게 열려있는 것이다.

그것은 비생명에서 생명으로, 현실에서 초월로 향하는 은밀하고도 내밀한 사통이기도 하다.

예술작품은 그 자체가 의사소통 행위다.

수신자와 발신자가 존재하고 둘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즉 작가와 대상, 작품과 독자의 관계다. 이는 시 공간을 초월하여 관계를 맺는 것이며, 질문과 답변, 대화의 형식이다.

이러한 의사소통은 창조적 경험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짚어온 김현승의 작품은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응시와 의사소통이며 삶에 대한 성찰이 조형적 울림과 맞물려 우리로 하여금 새롭고 다양한 삶의 풍경으로 안내하기에 충분하다.

신병은(시인, 미술평론)